정혜사 가는 돌계단 오르며 천재들 파란만장 삶 ‘반추’

      입력 : 2009.12.21 08:49 | 수정 : 2009.12.21 08:49

      일엽스님과 수덕사

      수덕사(충남 홍성)만큼 사연 많은 절이 또 있을까.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로 시작되는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는 그 정점에 있다. 이 노래는 속세의 눈으로 바라본 비구니를 그리고 있다.

      (좌) 우리나라 3대 고건축물의 하나인 수덕사 대웅전 (우) 수덕사에서 정혜사로 가는 길에 있는 만공선사 사리탑
      스님들이 불가에 귀의할 때는 어떤 화두를 받들고 간다. 그 화두는 아주 고귀하면서도 큰 것이다. 그러나 속세의 관심은 아주 속세적인 것에 가 있다. 이를테면 무슨 사연이 있어 머리를 깎았을까 하는 의문이 좋은 예다. 이런 관심은 비구보다는 비구니에게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은 비구니에게서 신파조의 무슨 사연을 캐내고 싶어 한다. 그게 필생의 화두를 받지 못한 촌부들이다. ‘수덕사의 여승’은 그런 범주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지극히 통속적인 노래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수덕사는 비구니 사찰이 아니다. 수덕사에 딸린 견성암에 비구니들이 있을 뿐이다. 수덕사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불가의 큰 맥을 지키고 있는 절이다. 조계종 5대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의 본산으로 도도한 선풍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도 이 절이 비구니 절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수덕사와 인연을 맺은 몇몇 여성 때문이리라. 일제 말기 신여성을 대표하던 김일엽과 나혜석.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며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두 사람의 인연은 수덕사까지 이어졌다. 그들이 수덕사에서 남긴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한 스님이 수덕사에서 정혜사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인연 ‘전설처럼 회자’

      일엽 스님(1896~1971)은 평남 용강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스님은 아버지가 목사라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다. 스님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 후 화가 나혜석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 등을 외치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결혼과 이혼, 일본 명망가 집안 자제와의 사랑과 실패 등을 겪으며 그녀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 때 지인을 만나 불교에 눈을 뜬다. 목사의 딸에서 비구니로 극적인 삶의 반전을 하게 된다.

      일엽 스님은 불가에 귀의한 후에는 불꽃같은 젊은 날을 뒤로 하고 수행에 집중했다. 일본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소년이 되어 찾아왔을 때도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부르라’고 엄히 대했다. 일엽 스님은 또 비구니의 지위 향상을 위한 일에도 적극 나서는 등 불단에 큰 자취를 남겼다.  

      나혜석(1896~1948)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여성해방론자였다. 그는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화를 배웠고,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다. <폐허> 동인을 구성해 김억, 오상순, 염상섭, 김일엽 등과 교류했다. 3남매의 엄마였던 그는 파리에 머물면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이자 훗날 친일 행각을 벌인 최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사랑을 택해 이혼을 하지만 최린에게도 버림받으면서 화려했던 인생은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결국, 나혜석은 일엽 스님이 사미계를 받은 수덕사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 수덕사의 조실 만공은 나혜석의 끈질긴 애원에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출가를 포기한 그는 행려병자처럼 세상을 떠돌다 1948년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1. 일엽 스님과 화가 나혜석, 고암 이응로의 자취가 어린 수덕여관. 지금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2. 고암 이응로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수덕여관에 머물며 바위에 새긴 암각화 3. 낙엽이 떨어져 쌓인 수덕사 절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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