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의 서재를 찾다

      입력 : 2011.08.22 08:40 | 수정 : 2011.08.23 16:14

      어스름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
      낯선 세상을 향해 떠나는 독서 여행

      한국종합예술학교 건축과 민현식 교수의 서재



      새벽 네 시 독서여행으로 시작하는 일상의 행복

      한국 현대건축의 지성으로 불리는 건축가 민현식 교수. 그는 매일 새벽 네 시부터 서너 시간 책으로의 짧은 여행을 떠난다. 편안한 복장으로 엎드린 채 좋아하는 이야기로 빠져드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이다. 그 시간 동안 여명이 그려내는 한강변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이 여행의 흥을 돋운다.

      “제게 독서는 ‘작가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 같은 재미를 느끼죠. 모르는 도시에서 헤맬 때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좋은 장소에서 느끼는 감동을 고스란히 책을 통해 얻습니다.”

      민 교수는 그만의 독서여행을 세밀하게 준비한다. 주말 아침에는 서둘러 편의점이나 신문 가판대를 찾아 5대 일간지를 구입한다. 신문 한 꾸러미를 거실 바닥에 놓고 주말 북 섹션을 펼쳐 살핀다. 어떤 책이 새로 나왔는지, 주목받는 책은 무엇인지, 어떤 관점으로 책을 바라보고 있는지 등 신문을 비교하며 흥미롭게 본다. 관심 있는 서평과 출간 소식은 스크랩한다. 이렇게 수집한 도서 정보와 주변 지인들의 추천을 받은 책은 메모해두었다가 인터넷 서점에서 정기적으로 사들인다. 이때 책에 대한 호기심이 식지 않도록 한두 권씩만 사는 게 민 교수의 오랜 원칙이다.


      몸으로 새기는 건축가의 독서법

      책을 읽으며 얻은 감흥과 정보는 필기를 통해 몸에도 각인시킨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붉은 책장과 심플한 라인의 긴 철제 책상, 러그로 꾸민 민현식 교수의 서재는 소박하면서도 품위가 느껴진다. 민 교수는 조선시대 선비의 문방처럼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서재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선비의 오기로 마음을 다잡아보는 집’이라는 뜻의 창덕궁 후원에 있는 기오헌(寄傲軒)이라는 정사를 모델로 삼았다.

      철제 책상에는 신문지가 깔려 있고 그 위에 잉크와 만년필, 다양한 펜이 든 통이 놓여 있다. 메모지와 가위, 풀, 지우개, 연필깎이, 카터 칼, 인덱스 스티커 등의 문방구들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이 모든 소품이 그의 독서에 동원된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것은 기본, 여백이나 행간에 메모도 한다. 때로는 스케치하듯 그림을 그리거나 메모지에 빡빡하게 글을 써서 그대로 책에 붙인다. 일부러 그날의 영수증과 입장권, 편지봉투를 메모지 대신쓰기도 한다. 나중에 그 기록들이 그날의 분위기를 되살려준다.

      “제 나름의 사유구조로 재편하고 요약하는 방법인데, 실은 읽는 것과 동시에 손을 놀려 머리뿐 아니라 몸에도 책을 새겨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끼적인 기록의 흔적은 그 책을 다시 읽게 될 때 당시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이런 흔적의 축적은 내 사유의 또 다른 축적이자 내 건축의 시작이기도 하지요.”

      한 작가나 어떤 한 분야의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외국 작가의 작품은 원서와 번역서를 동시에 읽는다. 또 시간이 흘러 재번역된 것들을 비교해가며 전에는 몰랐던 내용을 깨닫거나 전과는 또 다른 훈훈한 감동을 음미하기도 한다.


      건축이 향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책 

      고등학교 시절 잠파노와 젤소미나의 슬픈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읽기 시작한 영화 <길>의 시나리오는 그의 감수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군대에서 접한 강은교 시인의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작품은 그에게 ‘온몸 세포들이 다 들고 일어나는 듯한 감동’을 알게 해준 시다. 이후 우연히 갖게 된 《20세기 시집》을 계기로 수시로 시집을 들고 다니며 시를 읽고 외워 흥얼거리기도 한다. 대학교 다닐 때부터 즐겨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박경리의 《토지》다. 지금도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펼쳐든다.

      1 여행지 호텔에서 가져온 연필들이 수두룩하다. 그와 독서여행을 함께하는 친구들이다.
      2 매일 새벽 책을 읽고 기록하며 독서를 즐기는 민현식 교수.
      3 사회와 인간에 대해 더 체계적으로 알기 위해 읽기 시작한 철학책. 쉽지는 않았지만 읽을수록 많은 것을 얻게 된다.

      “특히 용이의 품에 안겨 월선이 죽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울컥 눈물이 납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볼 때마다 진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소설 《토지》와 《장미의 이름》은 서로 다른 성격의 감동을 줍니다. 좋은 건축물이 주는 감동과도 다르지요. 하지만 본질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사람에게 주는 감동이니까요.”

      반면 ‘끔찍한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 책도 있다. 1989년 영국에 머물며 건축을 공부할 때 접했던  J. 버거의 《Permanent Red》는 당시 불온서적이었다. 그 책을 읽고 새로운 시각을 접하며 지금까지 그가 알던 세상이 반쪽짜리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다.

      6년 전 안식년이 계기가 되어 철학책과 평전을 읽으며 사람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체계적으로 넓히고 있다.

      “질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들의 화두는 과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현대건축과 도시이론 실천들과도 연관되어 있어 등한시할 수 없지요. 평전은 한 인생의 서사이며 그 인생을 바라보는 저자의 특별한 관점의 기록이에요. 단순히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닌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의 서사이자 그 시대를 읽는 저자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나를 성찰하는 데 좋은 지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읽고 있습니다.”

      ‘건축이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머무는 사람의 생활을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민현식 교수. 건축가로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공부다. 그리고 책은 그에게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일상의 축복이다.


      민현식 교수의 추천 도서

      A Seventh Man 독일에서 일했던 터키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 책으로 그들의 처절한 삶을 느낄 수 있다. 터키 사람들이 먼저 독일로 간 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뒤따랐기 때문에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시대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란다.(존 버거, 국내 출판은 눈빛)

      Invisible Cities 건축과 도시에 대한 나의 상상력을 부추긴 책으로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환상의 여행을 하면서 세계와 기호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펼쳐놓는 작품이다.(이탈로 칼비노, 국내 출판은 민음사)


      / 여성조선
        취재 박미진 기자 | 사진 방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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