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가 경쟁력이다' 한·중·일 삼국 중 한국만 '한자' 등한시 한글과 한자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해야

      입력 : 2014.10.16 06:00

      지도

      한자가 요즘처럼 천대받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수년 전부터 일상에서 한자를 완전히 없애고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는 한글전용론자들의 주장이 일고 있다. “한자는 어렵고 불편하기 때문에 모두가 알 수 있는 국어(한글)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관련 전문가들은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 한자를 없애는 것은 장차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길이라고 지적한다. 한국과 함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인 일본과 중국은 초등학교 때부터 상용한자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고전에 담긴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정신, 말과 혼, 전통이 모두 사라져갈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다. 역사와 문화, 전통이 없는 나라는 영속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한글전용론자들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관련 기관들은 고전국역, 무료 한자 강의, 사이버 한문 강좌 서비스, 관련법 개정운동 등의 활동을 펼치며 한자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우리나라의 한자문맹률은 심각한 수준이다. 국민 90%가 반문맹(半文盲) 상태라고 지적한다. 한자문맹률은 동아시아 삼국(三國) 중 제일 높다. 신입사원이 사내 보고서에 나와 있는 한자를 읽지 못해 업무에 차질을 빚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이 같은 통계가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자가 우리와 멀어지면서 생기는 위와 같은 불행한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미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와 브레이크를 걸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지금이라도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금 시대에 한자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자를 아는 것이 과연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길일까. 한자를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현재의 한·미 관계보다 더 긴밀해질 것”이라며 “한·중 교류를 위해서도 한자 교육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국빈
      조선일보 DB / 전문가들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현재의 한·미 관계보다 더 긴밀해질 것”이라며 “한·중 교류를 위해서도 한자 교육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국빈 방한한 시진핑 주석 부부를 한국가구박물관으로 초청한 모습.(왼쪽)

      한국어의 표기 방식을 ‘한글전용’으로 할 것이냐, ‘국한문혼용’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해묵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문맹(文盲) 퇴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한글전용정책은 1970년을 기점으로 정부에 의해 강제화됐다. 이후 초·중·고 교과서에서 한자는 점차 사라져갔다. 현재 교육부는 각 학교가 한자 교육을 재량적으로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전국의 몇 개 초등학교가 한자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지는 통계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2005년에 제정된 ‘국어기본법’은 한자문맹률 상승 속도를 가속화했다. 이 법의 제1조를 보면 “이 법은 국어 사용을 촉진하고 국어의 발전과 보전의 기반을 마련하여 국민의 창조적 사고력의 증진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하고 민족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나와 있다. 현재 이법은 개정을 거쳐 27개 조항으로 이뤄졌는데 전 조항을 통틀어 ‘한자’는 딱 한 번 언급된다.

      국어 기본법 제14조는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 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14조가 한자를 다른 외국 글자와 같은 선상에 놓음으로써 한자를 외국 글자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국 한자교육단체와 이를 지지하는 학계, 정치권 원로 등으로 구성된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는지난 2012년 국어 기본법상의 한글전용정책에 대해 위헌법률심판(違憲法律審判)을 요청하는 헌법 소원을 제기해놓은 상태다.

      한자의 종말은 인간의 사고(思考) 제한해
      한자가 우리 생활에서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미 한글전용사회로 접어든 지금 문제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현재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51만 개의 단어가 표제어로 등재돼 있다. 이 중 한자어는 58.5%, 고유어 25.5%, 혼용어 10.6%, 외래어 5.4%로 한자어와 혼용어를 합치면 전체 표제어의 69.1%가 한자어로 돼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한문이 빠져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한자어 이해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시교육청의 조사 결과, 교과서 속 한자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외워 버리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2년 국어기본법이 위헌이라는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의 헌법소원(憲法訴願)을 대리한 김문희 변호사는 “지금의 한글전용세대는 한자어의 어원(語源)을 몰라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은 채 어림짐작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며 “이해하지 못하는 한자어는 점차 사라지거나 아니면 불명확한 언어로 남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불명확한 언어는 결국 인간이 사고(思考)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한자문화권 국가 간 경제 교류가 확산됨에 따라 중국과 일본은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은 훈장과 아이들이
      조선일보 DB / 한자문화권 국가 간 경제 교류가 확산됨에 따라 중국과 일본은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은 훈장과 아이들이

      한자가 사라질 미래에 한문학계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전통문화, 역사와의 단절’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조상들의 기록에서 전해지는 지혜와 정신을 계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재민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우리가 전근대사회(前近代社會)에서는 문자생활을 한자로 했다. 한글을 제대로 사용하게 된 지는 100년도 채 안 된 것”이라며 “한자를 배우지 않는 것은 2000여 년간의 옛 지식인들이기록한 역사와 문화를 접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전이 우리 삶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일까. 원주용 성균관대 동아시아지역연구소 연구 교수는 “고전은 한국의 5000년간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개인이 평생을 살면서 집약시킨 역사 기록물이기도 하다”며 “시간이 흐르면 문명(文明)은 바뀌지만 사람들의 사고(思考)는 똑같기 때문에 예컨대 2500년 전에 살았던 공자(孔子)의 삶을 ‘덤’으로 엿보면서 내 삶에 적용할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中·日 한자 집중하는데 ‘韓’만 후진(後進) 중 현재 대표적인 한자문화권으로 꼽히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자의 가치를 인식하고 초등학교 저학년 과정부터 한자교육을 강조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다. 중국과 일본은 한자문화권 국가 간 경제 교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한자 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우는 한시(漢詩) 30수를 100수로 늘려야 한다는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 내(內)에서도 한자문맹률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본은 총 1945자(字)이던 상용한자를 지난 2010년 개정해 2136자를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특히 고유어를 많이 쓰는 북한 역시 3500자를 교육용 한자로 지정해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에선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단계적으로 3500자를 배우도록 한다. 이명학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는 “중국 경제권에 포함되는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도 국가 차원에서 한자교육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관계가 현재의 미국보다 점점 더 긴밀해질 것이다. 국경도 맞닿아 있고, 정치·경제·사회적으로도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중·일 삼국 중 오직 한국만이 한자와 멀어지는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윤재민 교수는 “월남(越南·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한자를 쓰지 못하고 로마자를 사용하면서부터 자국의 문자, 문화, 전통을 잃었다”면서 “한국의 한글전용의 미래는 곧 지금의 월남 모습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계황 전통문화연구회 회장은 “결국엔 삼국(三國)이 하나라고 봐야 한다”며 “한자는 중국 글자니까 사용하면 안 되고,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논리로 한자를 버리면 삼국 중 한국만 도태될 것” 이라고 성토(聲討)했다.

      일찍이 한자의 중요성을 간파한 곳은 경제계다. 이 회장은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등 경제계에는 한자 교육을 강조하는 CEO(최고경영자) 들이 많다”며 “전통문화연구회로 신입사원 연수 때 한자의 필요성에 대한 강의를 해줄 강사를 요청하는 문의가 많이 온다”고 말했다.

      특히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의 한자 사랑은 경제계에서 이미 유명하다. 동아제약은 회사의 공지사항을 한자로 게시할 뿐만 아니라 기안서(起案書)의 내용도 한자로 표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두고 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자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말 속에 녹아있는 한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강 회장은 지난 2012년 <생활한자 3000자(동아제약 강신호 회장이 엮은)>라는 단행본을 저술하기도 했다.

      한자 아는 인재(人材) 원하는 기업 늘고 있어 입사 시 한자 자격증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직급이 올라갈수록 한자에 대한 니즈(needs)는 높아진다. 승진시험에 한자시험을 채택하는 기업들이 많기 때문.

      기업 내에서 중요한 인재(人材)가 되기 위해서는 한자 실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인 셈이다. 박광원 NH농협은행 노사협력 팀장은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한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보고서를쓸 때, 한자를 병기해야만 의미가 좀 더 정확하게 전달된다는 것을 깨닫고 최근에는 매일 일정량의 한자를 반복해서 보는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학 교수는 “일반 기업에서는 문서의 대부분을 한글로 작성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한자가 필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 용어가 대부분 한자어인데 이러한 한자어의 개념과 뜻을 정확히 알고 쓰는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어문회에 따르면, 한자 자격증을 우대하는 곳은 국가정보원, LH(한국토지주택공사), 한국정책금융공사 등 공공기관이 12곳, 삼성전자, 삼성물산, 우리은행 등 기업체가 10곳이다. 대학은 입시 관련해 우대하는 곳이 49곳이고, 18곳은 학점과 졸업 관련해 우대한다. 자체 승진시험으로 한자 실력을 검증하는 기업까지 고려하면 한자 인재를 원하는 기업은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한글의 우수성과 한자의 장점을 결합해 언어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세계적 베스트셀러 <총, 균, 쇠>, <문명의 붕괴> 등의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UCLA 지리학과 교수는 “자신이 20대로 돌아간다면 첫 번째로 한글을 배우고 싶다. 만약 세계의 언어를 통합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조건 한글이 돼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한글의 우수성에 탄복한다.

      그가 칭찬하는 한글의 우수성 중 하나는 ‘한글은 표음(表音)문자와 표의(表意)문자의 장점만을 합쳐 놓았다’는 것이다. 자음 14개와 모음 10개를 이용해 말소리를 간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표음문자이며, 뜻이 담긴 한자어를 사용해 보다 함축적이고 깊이 있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윤재민 교수는 “한자와 한글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속에서 발전해야 한다”면서 “유럽 국가의 사람들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인접 국가의 언어를 여러 개 배우듯 우리나라도 한자를 먼저 알고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조선
      백예리 기자,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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