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음악, 보랏빛 와인

  • 기고자=양승찬 리슬링컴퍼니 대표

    입력 : 2018.02.14 16:06

    [양승찬의 와인 먹고 '音音'] - (6) 자우림의 음악이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

    보라색에는 어떤 힘이 있다. 색이 예쁜 것을 넘어 내 말과 생각과 시선을 빼앗고 멍하니 바라보게 한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모든 것을 멈추고 그것에 빠져든다. 그 힘은 나를 어디까지 이끌까, 끝을 알 수가 없다.

    이미지 크게보기
    popcorn violet, 다른 행성에 있는 팝콘 나무 보는 느낌 © 양승찬
    그렇다면 덕후(특정 분야에 굉장히 빠져있는 사람)가 보라색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평소에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년에 음악 프로그램 ‘EBS 스페이스 공감’이 녹화장을 서울 매봉에서 일산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김창완 밴드, 장필순, 이승열에 이어 2017년 6월 1일 자우림이 매봉에서의 마지막 무대를 맡았다. 자우림의 공연 중간에 나는 문득 보랏빛 와인을 떠올렸다. 내 삶의 일부였다고 표현할 만큼 나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EBS 스페이스 공감이기에, 이틀 후 나는 애잔한 마음으로 보랏빛 와인을 마시며 자우림의 공연 영상을 SNS에 올렸다.

    이미지 크게보기
    보랏빛 와인을 마시며 본 스물다섯, 스물하나 영상 © 양승찬

    3주쯤 지나, 모르는 외국인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우림 20주년 콘서트 티켓을 구하기 어렵냐고. 글쎄, 예매가 쉽지는 않을 텐데. 이야기를 더 해보니, 응?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고? 내가 SNS에 올린 걸 보고 자우림에 빠져서 계속 자우림 음악을 찾아 들었다고? 자우림 콘서트 티켓을 구할 수 있다면 한국행 항공권을 살 거라고? 뭐야 얘는?

    한국에서는 인기가 좋으면 콘서트 티켓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몇 분 만에 끝난다. 날짜 선택부터 좌석 지정에 결제까지 몇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순발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이런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외국인이라 예매는 내가 대신 시도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 덕후는 한국행 항공권을 끊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진짜 왔다, 진짜 왔어! (좌: 크리스토퍼, 우: 양승찬) © 이상봉
    크리스토퍼는 자우림 20주년 콘서트를 보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습한 여름을 힘들어하긴 했지만,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는 점심의 메밀국수와 저녁의 순댓국을 좋아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이 왔다. 자우림의 기타리스트와 많은 음악적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자우림 연말 콘서트 ‘XX’에 또 오겠다고.

    이미지 크게보기
    결국 덕후가 자우림을 만났습니다. © 양승찬

    자우림의 음악이 크리스토퍼에게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타게 했다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우림의 곡은 ‘샤이닝’이다. 그리고 조금은 털어놓기 어려운 말이지만 샤이닝은 나를 울린다. 새벽에 혼자 샤이닝을 듣고 있으면 내 가슴 속 그 무언가를 툭툭 건드려서, 윽, 윽, 참아내려 해도 결국은 얼굴을 찡그리다 눈물을 쏟아낸다. 물론 조금의 알코올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면 자우림의 음악에는 어떤 알코올이 어울릴까. 추천하고 싶은 와인이 있다. 수입사 이름도 퍼플퀸, 보라색이 연상된다. 퍼플퀸은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역의 와인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뱅상 지라르댕의 푸이 퓌세와 함께 © 양승찬
    * Vincent Girardin Pouilly-Fuissé Les Vieilles Vignes 2014

    뱅상 지라르댕(Vincent Girardin)이 부르고뉴의 푸이 퓌세(Pouilly-Fuissé) 지역에서 샤르도네(Chardonnay)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으로, 비에유 비뉴(Vieilles Vignes)는 포도나무 수령이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맛을 보면 유채꽃이나 귤껍질 같은 싱그러운 향에 레몬 캔디를 먹는 듯한 상큼함, 생생하고 산뜻한 산미까지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와인이 예쁘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문득 꽃무늬가 수 놓인 하얀 웨딩드레스에 3색 꽃다발을 들고 있는 신부가 생각난다. 꽃다발은 보라색 제비꽃, 노란색 프리지아, 빨간색 히비스커스. ‘스물다섯, 스물하나’ 흑백 영상에 김윤아의 목소리가 색칠되듯이 말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 네이버 온스테이지
    크리스토퍼가 빠져든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화이트 와인을 맞췄다면 내가 빠져든 ’샤이닝’에는 레드 와인을 맞춰보았다.

    이미지 크게보기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부른 '샤이닝'을 뒤로쉐의 샴과 함께 © 양승찬
    * Domaine Duroche Gevrey-Chambertin 'Champ' 2014

    뒤로쉐(Duroche)가 부르고뉴의 쥬브레 샹베르땅(Gevrey-Chambertin) 마을에서 피노 누아르(Pinot Noir) 품종으로 만들었다. 와인 이름에서 샴(Champ)은 프랑스어로 들판이라는 뜻인데, 샤이닝 가사 중에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 있네’라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샤이닝 뮤직비디오 © Jaurim

    샤이닝을 틀어놓고 와인을 먹어 본다. 이 와인은 진득하다. 가벼운데 진득하다. 말이 모순이지만 먹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장미, 짙은 장미를 잔뜩 짓이겨 만든 향수가 생각난다. 묽은데 어떤 것들이 차 있다. 번뇌, 고뇌, 머리 아픔, 왜인지 어떤 와인 테이스팅 용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들꽃, 라즈베리, 허브와 채소, 젖산 발효, 이런 게 뭐가 중요한가. 그 어떤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냥 샤이닝 다시 한번 들을래, 이 와인 다시 한잔 마실래.

    샤이닝을 들어보면, 잔잔한 피아노를 시작으로 홀로 노래하다 드럼과 기타와 함께 ‘풀리지 않는 의문들, 정답이 없는 질문들’을 고민한다. 다른 것이 사라지고 정적으로 노래가 끝나면 ‘후..’ 숨을 내쉬며 현실로 돌아온다. 태양이 타오르고 별이 내리며 바람 부는 들판에 홀로 서 있다 온 기분. 노래 가사처럼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는 그곳이 있을까, 보라색의 힘으로만 다녀올 수 있는 특별한 세상이 아닐까. 여러분에게도 이 보랏빛 여행을 권해보고 싶다. 크리스토퍼가 그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양승찬 리슬링컴퍼니 대표 (www.rieslingcompany.com)
    덕후. 옷장에 옷 대신 와인을 넣어둔 불효자. 내쫓겠다는 엄마님의 으름장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 특히 리슬링 덕후. 매달 미수입 모젤 와인 시음회를 주최하는 모젤바인 링(Moselwein Ring)을 운영하고 있고 시음, 교육, 홍보 등 리슬링 관련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아돌프 슈미트 모젤와인협회 명예회장에게 미스터 리슬링이란 호칭을 듣기도 했다. 결국 리슬링 컴퍼니라는 회사를 만들어 리슬링 폰트 등 F&B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 와인 먹고 '音音'은, '고추 먹고 맴맴'처럼 와인 먹고 음악 듣는 행위다. 한글로 읽으면 '음음', 음료와 음악 혹은 음악과 음료의 조합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커피, 한국술, 월드뮤직, 인디밴드, 등등 어떤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주로 와인과 재즈를 다룰 듯 하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chosun.com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일, 와인, 재즈 기고자=양승찬 리슬링컴퍼니 대표
    벚꽃엔딩, 벚꽃와인 기고자=양승찬 리슬링컴퍼니 대표
    로즈 로제, 장미 음악과 와인 기고자=양승찬 리슬링컴퍼니 대표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