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와인, 재즈

  • 기고자=양승찬 리슬링컴퍼니 대표

    입력 : 2018.06.15 12:31

    [양승찬의 와인 먹고 '音音'] - (9) 와인과 음악의 무지가 이끈 독일행


    "요새도 리슬링만 마셔요?" 얼마 전 누가 한 말에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렇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리슬링으로 통한다. 2012년부터 리슬링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양슬링', '리덕(리슬링 덕후)', '미스터 리슬링', '리슬링이 사랑한 남자' 등의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나는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그렇게 먹어보고 먹어봐도 늘 궁금증은 남았고, 오래전부터 유럽에서의 시간을 계획했다. 3개월, 여행보다는 거주에 가까이. 지금은 독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퓐더리시 마을에서 열린 와인 페스티벌에서 리슬링 한 잔! © 양승찬
    퓐더리시 마을에서 열린 와인 페스티벌에서 리슬링 한 잔! © 양승찬

    독일의 13개 와인 생산 지역 중 하나인 모젤(Mosel)에서도 퓐더리시(Pünderich) 마을에 머무르고 있다. 시골이다. 동네에 슈퍼가 변변치 않고 인터넷이 안 되다시피 느려서 답답하다. 하지만 이곳에는 국제적인 명성으로는 이 마을을 대표한다고 해도 될 와인 생산자 클레멘스 부시(Clemens Busch)가 있다. 그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지만, 솔직히 와인을 만들어 본 적 없는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는 어렵고 어깨 넘어 보거나 이것저것 물어보고 가끔 체험해보는 정도이다. 그래도 배우는 게 많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진 궁금증이 풀렸냐고? 어느 정도는 그렇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의 와인 생산자를 찾아다니며 포도밭과 와인 생산 시설을 보고, 그들의 와인을 놓고 같이 맛보고 이야기하며 와인을 보는 시야가 확실히 넓어지기도 했다.

    퓐더리시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찍은 와인과 앨범 사진 © 양승찬
    퓐더리시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찍은 와인과 앨범 사진 © 양승찬

    한국을 떠나기 전 챙겨온 앨범이 있다. 이한얼 1집. 2004년 그도 한국을 떠나 독일을 향했다. 원래는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 지휘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군대 제대 이후 클래식 피아노 전공으로 독일로 갔다가, 재즈 피아노로 전향했다. 이런 변화의 이유가 궁금할 것 같은데, 그는 그의 음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공연에서 그가 한 말이 있다. 누가 자기의 음악을 듣고 외로움과 낯섦이 드러난다고 했다고. 그때는 음악이 그러네 했지만 내가 독일에서 지내다 보니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와인 시음하러 다니고 이것저것 경험하는 건 좋은데 그 외의 삶은 고생이다. 왜 매일매일 문제가 생기는지, 그리고 잘 풀리지 않으면 치명적인지. ‘꾸역꾸역’이 내 독일에서의 생활을 잘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나의 독일 생활과 클레멘스 부시의 와인과 이한얼의 1집 앨범에서 어떤 연결점을 찾았다. 한국을 떠나며 앨범을 챙기고 어렴풋이 이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는데, 2달이 지나며 이 글을 써야겠다 싶더라. 클레멘스 부시의 드라이 와인 3개와 이한얼의 곡 3개를 맞춰보았다.

    1. Clemens Busch, Riesling vom Blauen Schiefer, 2015

    퓐더리시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찍은 와인 사진 1, blue slate © 양승찬
    퓐더리시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찍은 와인 사진 1, blue slate © 양승찬

    향에서는 어떤 꽃향,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화사한 꽃향은 아니다. 정돈된 느낌. 묽다. 물처럼 묽고 가벼우면서 어떤 미네랄(mineral)의 질감을 낸다. 살짝의 스파이스(spice)도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고춧가루의 통각이 아니라 혀 위에서 살짝 불꽃이 튀는 것 같은, 톡 쏘는 화한 느낌.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조용하다. 이게 바로 블라우엔 쉬퍼(blauen schiefer), 청색이 도는 점판암 토양에서 나오는 와인의 특징이다. 강한 음식과는 맞추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재료 자체를 살리는 심심한 느낌의 음식이 떠오른다.

    여기에 맞춘 음악은 Unwissened, 독어인데 무지(無知)라는 뜻이다.



    이한얼 트리오 Han-Earl Lee Trio - Unwissend at EBS Space © 이한얼

    독일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어서이다. 클레멘스 부시 와인 시음을 마치고 나서, 그들이 만드는 점판암 토양의 와인 중에서 회색, 빨간색. 청색 중 어떤 것인지 맞춰보겠다고, 나는 등 돌리고 있을 테니 아무 와인이나 달라고 했다. 집중해서, 자, 무엇일까, ‘red?’, ‘no’. ‘gray?’, ‘no’. 답은 blue. 으아아악! 나는 엄청 열이 받았다. 한국에서 나름 열심히 하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잘 모르는구나. 그래서 다음날 따로 집중 시음을 했다.

    2. Clemens Busch, Rothenpfad, GG, 2015

    퓐더리시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찍은 와인 사진 2, red slate © 양승찬
    퓐더리시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찍은 와인 사진 2, red slate © 양승찬

    오래 두어 껍질이 말라가는 귤을 코에 대보면 살짝 단 향긋한 향이 난다. 시트러스(citrus) 계열의 과일 껍질이 말라갈 때의 느낌, 조금은 생꽃에서 맡는 꿀향에 가까운 단향. 이 와인의 향이 그렇다. 맛을 보면 아까 말했던 톡 쏘는 듯한 화한 매운 느낌이 조금 더 나온다. 그리고 미네랄. 와인의 맛에서 미네랄을 설명하자면, 우리가 소금을 먹으면 짠맛 외에도 이것저것 맛이 있는데 그 짠맛을 뺀 씁쓰름한 질감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와인에서 이런 미네랄의 집중도가 높아 묵직한 느낌을 주고 벌컥벌컥 넘어가지는 않는다. 와인의 힘이 좋아 기름진 음식과 맞춰도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여기에 맞춘 음악은 Fremd, 역시 독어이고 ‘낯선’의 뜻이다.



    [EBS 스페이스 공감] 미방송 영상 이한얼 - Fremd © EBS

    독일에서 지내며 낯선 것은 처음 보는 광경만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그리고 그것의 불편함과 이어지는 당황스러움과 짜증. 아마도 내가 독어를 잘 하거나 독일 생활에 익숙하면 덜 고생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 버스 333번이 기차역에 늦게 도착해서 기차를 못 탔고 일정에 문제가 생겼다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기차역에서 전화도 인터넷도 안 되거나, 슈퍼 계산대에서 줄을 서 있는데 점원이 내 차례에서 갑자기 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으러 가는 상황이란, 와, 아니 나 지금 이거 빨리 계산하고 333번 버스 타러 가야 한다고, 이거 놓치면 오늘 집에 못 간다고!!!

    3. Clemens Busch, Felsterrasse, 2015

    퓐더리시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찍은 와인 사진 3, gray slate © 양승찬
    퓐더리시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찍은 와인 사진 3, gray slate © 양승찬

    와인의 특별함이라는 부분에서 시음 공간 안에 펠스테라쎄 밭의 액자를 둘 정도로 의미가 있다. 실제로 펠스테라쎄라는 밭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식 명칭인 마리엔부륵(Marienburg) 밭에서 돌출부 일부분을 별도로 구분하여 와인을 생산하고 펠스테라쎄라고 자체적으로 이름을 붙인다. 70년 이상의 오래된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고 생산량은 적다. 향을 맡아보면 확실히 집중도가 강하고, 바나나 껍질 같은 살살 단 과일향, 그리고 맛을 보면 고운 신맛과 미네랄. 산도가 예쁘게 밤하늘의 별처럼 펼쳐지는 것 같다.

    여기에 맞춘 음악은 Stars, 이 곡은 2016년 8월 솔로 콘서트에서 즉흥적으로 연주한 것이다.



    Han-Earl Lee Solo Concert at Audioguy - stars © 이한얼

    음악을 듣고 있는 지금 베란다로 나가면 북두칠성을 비롯해 별이 많이 보인다. 독일에서의 삶이 어떤지 생각해 본다. 잘 모르겠다. 그동안의 고생이야 말해 무엇하리, 내가 전생에 유럽에 죄를 지었나보다고 농담조로 반문을 많이 한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자꾸 한 잔 더 들이켜게 한다. 검정 하늘을 수놓는 반짝임이 예쁘다.

    클레멘스 부시는 와인 병목의 색을 구분해놓는데, 3개의 와인이 각각 다른 색의 점판암 토양이다.

    왼쪽부터 1, 2, 3번 와인 순서대로 blue, red, gray slate 토양을 표시했다. © 양승찬
    왼쪽부터 1, 2, 3번 와인 순서대로 blue, red, gray slate 토양을 표시했다. © 양승찬

    솔직히 말하면 클레멘스 부시의 와인은 이해가 필요하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집중해서 모습을 지켜봐야한다. 그의 철학이 있지만, 어쩌면 자칫 와인의 특징이 잘 안 드러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른 색의 점판암에서 나오는 모습을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하며 먹으면 도움이 된다.

    이한얼의 음악도 그렇다. 휘이 지나가며 배경 음악으로 들으면 그냥 클래식에 가까운 피아노 연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과 연주에는 그가 10여 년 살았던 독일의 도시 바이마르(Weimar)에서 받은 느낌이 담겨있다. 언제 바이마르에 다녀오면 그의 음악이 또 다르게 들릴 것 같다.

    언젠가부터 독일의 버스나 기차 안에서 바깥 풍경 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다. 조금은 일상이 되어가는 듯한 이 순간들이 언젠가는 덜 낯설어질까. 와인은 깊숙이 들어가니 여전히 잘 모르는 것들이 많은데 여기서의 경험으로 덜 무지해질까. 그럼에도 Stars는 듣고 있으면 아름답다. 그리고 독일에 와서 리슬링을 흔히 먹을 수 있는 건 참 좋다.

    양승찬

    /양승찬 리슬링컴퍼니 대표 ( www.rieslingcompany.com )
    덕후. 옷장에 옷 대신 와인을 넣어둔 불효자. 내쫓겠다는 엄마님의 으름장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 특히 리슬링 덕후. 매달 미수입 모젤 와인 시음회를 주최하는 모젤바인 링(Moselwein Ring)을 운영하고 있고 시음, 교육, 홍보 등 리슬링 관련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아돌프 슈미트 모젤와인협회 명예회장에게 미스터 리슬링이란 호칭을 듣기도 했다. 결국 리슬링 컴퍼니라는 회사를 만들어 리슬링 폰트 등 F&B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 와인 먹고 '音音'은, '고추 먹고 맴맴'처럼 와인 먹고 음악 듣는 행위다. 한글로 읽으면 '음음', 음료와 음악 혹은 음악과 음료의 조합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커피, 한국술, 월드뮤직, 인디밴드, 등등 어떤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주로 와인과 재즈를 다룰 듯 하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chosun.com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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