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들의 헌법이 따로 있다고?

  •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명욱

    입력 : 2018.06.19 17:30

    100년 전, 한국의 술 문화를 고민하며

    개인적으로 술의 역사에서 가장 궁금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 시절이다. 이유는 한국의 술 문화와 제도가 일제에 의해 요동을 치고, 새로운 술이 마구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시절의 술 문화를 생각하면, 그저 막걸리나 마실 듯한 느낌이지만 의외로 다양했다. 1900년대 초에 이미 맥주를 수입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아예 일본 기린 맥주와 삿포로 맥주가 영등포에 공장을 세운다. 포항에서는 산토리가 진출, 포도 재배뿐만이 아닌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고, 안동소주는 산업화에 성공, 본격적으로 만주 및 일본으로도 수출한다.

    당시 맥주는 저장할 냉장고가 없다 보니 우물 속에 넣고 마시라고 했으며, 저장은 지금처럼 플라스틱 박스가 아닌, 나무 상자에 맥주를 담아 저장했고, 병을 보호하기 위해 왕겨를 넣어 깨지는 것을 막았다. 지금으로 보면 꽃게 상자에 톱밥을 넣은 것과 개념이다.

    월간지 별건곤에 기록된 주국헌법 내용
    애주가들의 술에 대한 철학, 주국헌법(酒国憲法)
    그렇다면 이 시절에는 어떻게 술의 풍류를 즐겼을까? 암울했던 시대인 만큼, 문화로 즐기는 것이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이러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유명했던 월간지 중 하나인 ‘별건곤’(주석1)에 주국헌법(酒国憲法)이란 것이 기록된 것이다. 주국이란 말 그대로 술의 나라란 의미인데, 결국 애주가들의 술에 대한 예절과 철학을 담은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사랑 받는 예절이며, 반대로 미움 받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언제 술을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고 느꼈을까?

    ‘십불출’이라고 불린 나쁜 술 예절
    한국말에는 팔불출이란 표현이 있다. 자신의 자랑이 지나치거나 또는 실수가 잦은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팔불출이라고 불리는 것 보다 더 심한 표현이 바로 십불출이다. 바로 술 마실 때 너무 눈치가 없거나,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주국헌법에서는 술 예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 십불출이라는 표현을 썼다. 대표적으로는 술 잘 안 먹고 안주만 먹는 자, 남의 술에 생색내는 자, 술잔을 잡고 잔소리만 하는 자, 술 먹다가 딴 좌석에 가는 자, 술 먹고 따를 줄 모르는 자, 상갓집 술 먹고 노래하는 자, 잔칫집 술 먹고 우는 자, 남의 술만 먹고 제 술은 안 내는 자, 남의 술자리에 제 친구 데리고 가는 자, 연회 주석에서 축사를 오래 하는 자이다. 모두 주국헌법 21조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술 마시기 좋은 날이란?
    흥미로운 것은 술 마시기 좋은 날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땀 흘린 다음에 맥주, 비오는 날 막걸리와 같은 지금처럼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대표적으로는 천리 타향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 비낀 바람에 가랑비 내리는 저녁때, 여관 한 등에 무료한 때, 눈이 하얗게 내린 달밤에, 꽃이 피거나 잎이 떨어질 때, 우울하거나 슬플 때, 통쾌하여 흥분되었을 때다. 이 주국헌법만 본다면 지금보다 훨씬 운치가 있었던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이유는 지금은 애주가하면, 눈이 하얀 게 내린 달밤에 마시고 싶다거나, 꽃이 피거나 잎이 떨어질 때가 아닌 단순히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국헙법이 게재된 월간지 별건곤은 결국 1934년 폐간 당한다. 일제에 의해 주세법, 주세령이 공포되어 집에서 술을 빚는 가양주 문화는 사라져가고 있었던 당시의 술 문화. 이러한 상황속에서의 주국헌법은 우리 술의 낭만을 보여준 마지막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주석1: 별건곤은 1926년부터 1934년까지 발행된 대중적인 종합 잡지다. 건곤은 천지라는 뜻으로, 결국 별천지, 별세계, 특이한 세계란 의미로 해석된다. 특권 위층에게만 향유되던 근대적 교양과 문화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수필, 전기, 논설, 탐방기 등을 많이 게재했다. 1930년대 들어서 시사적인 내용은 사라지고, 결국 1934년 종간된다>
    명욱 전통주 갤러리 부관장, 주류문화칼럼니스트
    명욱 전통주 갤러리 부관장,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일본 릿쿄(立教)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0년전 막걸리 400종류를 마셔보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포탈사이트에 제공했다. 가수겸 배우 김창완 씨와 SBS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전통주 코너를 2년 이상 진행했으며, 본격 술 팟캐스트 '말술남녀'에도 출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O tvN의 어쩌다어른에서 술의 역사 강연을 진행했다. 명욱의 동네술 이야기(blog.naver.com/vegan_life) 블로그도 운영중이며,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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